[DBR]놀림 받던 ‘외톨이 괴짜’가 소비 트렌드 이끈다

정지영기자 , 조승연 문화전략가

입력 2016-01-18 03:00 수정 2016-01-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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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계 총아가 된 ‘너드’ 문화

삼성이 세계 최초로 스마트워치를 내놓았을 때 미주 지역에서는 ‘스마트워치를 섹시하게 포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조롱부터 나왔다. 일반적으로 ‘기계는 섹시할 수 없다’라는 것이 미국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의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3년 킥스타터가 ‘페블’이라는 스마트워치를 시장에 내놓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페블은 그해 상반기에 9만3000개가 팔렸고 27만5000개의 선주문을 받았다. 지금은 많은 글로벌 기업이 너도나도 스마트워치를 내놓으면서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스마트워치는 현재 비즈니스계에 없어서는 안 될 아이템이 됐다.

스마트워치는 어떻게 대세가 됐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성은 없고 첨단 기술에는 천재적인 ‘너드(Nerd)’라는 새로운 그룹이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이끌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학창 시절 놀림의 대상이었던 너드들이 자라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가 됐고 이제는 그들이 글로벌 비즈니스를 이끌고 있다.


○ 너드, 놀림의 대상에서 시대의 선도자로

1990년대에 국내 TV에 방영됐던 미국 학원 시트콤 ‘베이사이드의 얄개들(Saved by the Bell)’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가장 재미있는 캐릭터는 ‘스크리치’로 수학, 공학, 과학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사회성이 없고 패션 감각마저 제로인 학생이다.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어도 기분 나빠할 말만 골라 해 번번이 거절당하며, 다른 학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으로 항상 놀림거리가 되거나 왕따를 당했다. 이 캐릭터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새로운 청소년 또래 집단 중 하나인 ‘너드’ 또는 ‘긱(Geek)’의 상징이 됐다.

너드들은 사회성이 부족해 한동안 왕따를 당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위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너드의 전유물이자 장난감이던 개인용 컴퓨터가 필수품이 되면서부터다. 너드들이 어릴 때부터 갈고닦은 코딩 기술은 엄청난 돈을 버는 신생 사업의 핵심 노하우가 됐다. 학창시절 왕따를 당하던 너드들은 이제 매사추세츠공대(MIT)나 캘리포니아공대(칼텍)와 같은 세계적인 대학을 졸업하고 수억 원대의 연봉을 받는 섹시하고 부러운 젊은이들이 됐다. 너드였던 게이츠, 야후 설립자 제리 양, 저커버그 등은 세계 경제를 주름잡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너드들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 비범하고 똑똑해서 일반인들과 섞이기 어려운 천재들이라는 인식이 싹텄다. 이 시기에 인터넷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닷컴 백만장자(Dot-Com Millionaire)’라고 불렀다. 닷컴 백만장자들은 이전까지 미국에서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아내와 똘똘하게 생긴 두 자녀의 인사를 받으며 출근하는 성공한 남자의 상징을 대체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새로운 표상으로 떠올랐다.

너드의 대표적인 예가 저커버그다. 그는 항상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크 저커버그는 이에 대해 “인간이 하루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옷에 대한 고민을 줄이고 업무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저커버그의 이와 같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박수를 보냈다. 사실 이건 그리 새로운 말이 아니다. 과거 미국 학교에서 너드들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하던 말과 비슷하다. 그땐 비웃음을 받았지만 지금은 박수를 받으니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너드 문화가 주류를 장악하면서 엑스맨, 캡틴 아메리카, 혹성탈출 시리즈 같은 너드 문화의 전유물이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재포장돼 호황을 누리고 있다. 미국의 만화 유통사인 다이아몬드 코믹스는 2012년부터 2013년 사이에 매출이 9% 신장해 5억1760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너드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글로벌 문화시장에 끼어들기가 곤란할 정도가 된 셈이다.


○ 너드 문화 부상의 시사점

너드 문화의 부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팔로어가 많은 재벌 2세나 연예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도 ‘트렌드’나 ‘라이프 스타일’ 같은 단어를 들으면 완벽하게 연출된 세련된 모습을 연상한다. 특히 유행을 선도하는 세련된 연예인이나 패션모델, 또는 미국 사교계의 가십에 오르내리는 유명 재벌 2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래서 많은 패션 회사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SNS를 통해 여러 가지 분석을 한다. 하지만 진짜 새로운 트렌드의 원형을 만들어 내는 실험실은 할리우드, 실리콘밸리, 매디슨 애비뉴처럼 일반인들이 동경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고등학교의 교실이다. 왜냐하면 혜성처럼 나타나는 새로운 트렌드 리더 그룹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너드 혹은 긱들처럼 학창 시절부터 그 형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주류 ‘인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가들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서구 인문학을 배웠다. 하지만 각 트렌드 리더 그룹은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며, 그들 라이프스타일의 기반이 되는 인문학은 취향 그룹에 따라 다르다. 너드에게는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스타트렉’ 같은 그들만의 고전이 있고, 전설적인 미국 록밴드 R.E.M과 같은 그들만의 클래식이 있다. ‘미국 문화’ ‘유럽 문화’ 같은 막연한 개념으로는 이런 소비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셋째, 우리는 새로운 트렌드 리더들이 부상할 때마다 그들의 사고방식의 기본이 된 문화 상품을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 10년 전만 해도 만화, 일렉트로 음악, 공상과학(SF) 판타지 같은 것은 틈새시장 전략을 추구하는 기업만 관심을 가진 비주류 문화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문화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경제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다음 트렌드 리더들 역시 전혀 다른 음악, 문학, 문화적 취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트렌드 리더가 바뀔 때마다 ‘주류 취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트렌드 리더를 포착하고 그들이 만들어 낸 문화 환경을 이해하는 기업은 글로벌 마케팅에 성공할 확률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조승연 문화전략가
정리=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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