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시간이 마모시키는 기억은…
김준일기자
입력 2015-12-20 15:33 수정 2015-12-20 15:35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다산책방·2012년)
소설은 영국에 사는 평범한 60대 노인(토니 웹스터)이 독자에게 들려주는 회고담으로 시작한다. 노인은 에이드리언 핀 등 고등학교 친구들을 둘러싼 우정 사랑 그리고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읊조려 나간다.
대학에 진학한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학생과 사귀게 된다. 하지만 토니는 부유한 베로니카와 신분의 격차를 느끼던 참에 베로니카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받아들여 주지 않아 헤어진다. 얼마 후 에이드리언은 토니에게 베로니카와 사귀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한다. 토니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애써 담담하게 애이드리언에게 답장을 보낸다. 또 다시 얼마 뒤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동맥을 그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토니는 곧 이 일을 잊는다.
60대가 된 토니는 우연한 계기로 에이드리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가온 진실은 1인칭 화자인 토니가 독자들에게 알려준 기억들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이 기억해온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곡해돼 있었고, 과거의 사건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돼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계속 뭉개던 토니는 책 말미에서야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이라며 자신의 기억이 잘못됐음을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소설은 시간이 기억을 어떻게 마모시키는지, 그리고 이렇게 마모된 기억이 어떤 파국을 불러오는지를 다룬다. 어디 토니만의 이야기이랴. 기억은 본인 위주다.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 본인의 잘못은 가리고 다른 사람의 흠을 부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흠칫 놀랄 때가 많다.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니’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다가도 돌아오는 길에선 타인의 ‘불완전한’ 기억을 무시하며 ‘역시 저 사람은 본인 위주로 기억하는구만’하고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기억은 그만큼 알량하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은 사실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기만이고 농락일 수가 있다.
김준일기자 jikim@donga.com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다산책방·2012년)
소설은 영국에 사는 평범한 60대 노인(토니 웹스터)이 독자에게 들려주는 회고담으로 시작한다. 노인은 에이드리언 핀 등 고등학교 친구들을 둘러싼 우정 사랑 그리고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읊조려 나간다.
대학에 진학한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학생과 사귀게 된다. 하지만 토니는 부유한 베로니카와 신분의 격차를 느끼던 참에 베로니카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받아들여 주지 않아 헤어진다. 얼마 후 에이드리언은 토니에게 베로니카와 사귀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한다. 토니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애써 담담하게 애이드리언에게 답장을 보낸다. 또 다시 얼마 뒤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동맥을 그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토니는 곧 이 일을 잊는다.
60대가 된 토니는 우연한 계기로 에이드리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가온 진실은 1인칭 화자인 토니가 독자들에게 알려준 기억들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이 기억해온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곡해돼 있었고, 과거의 사건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돼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계속 뭉개던 토니는 책 말미에서야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이라며 자신의 기억이 잘못됐음을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소설은 시간이 기억을 어떻게 마모시키는지, 그리고 이렇게 마모된 기억이 어떤 파국을 불러오는지를 다룬다. 어디 토니만의 이야기이랴. 기억은 본인 위주다.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 본인의 잘못은 가리고 다른 사람의 흠을 부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흠칫 놀랄 때가 많다.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니’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다가도 돌아오는 길에선 타인의 ‘불완전한’ 기억을 무시하며 ‘역시 저 사람은 본인 위주로 기억하는구만’하고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기억은 그만큼 알량하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은 사실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기만이고 농락일 수가 있다.
김준일기자 ji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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