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전망 보이면 ‘규제 열외’… 日 2015년 설비투자 24% ↑

황태호 기자

입력 2015-11-11 03:00 수정 2015-11-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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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한국경제, 뛰는 선진경제]<2>부활하는 제조업 강국 일본

53년 만에 다시 선보인 ‘일본산 항공기’ 이달 첫 비행을 앞둔 일본 미쓰비시항공기의 중형 여객기(100인승 이하) ‘MRJ’가 공장에서 제작되는 모습. MRJ는 1962년 첫 비행을 한 ‘YS11’ 이후 53년 만에 일본 기업이 제작한 항공기다. 미쓰비시항공기 제공
일본 중공업계는 요즘 ‘빅 이벤트’를 앞두고 기대감에 들떠 있다. 이달 나고야에서 열리는 미쓰비시항공기의 완성기 ‘MRJ(Mitsubishi Regional Jet)’의 첫 비행 행사다. 지난해 10월 완성품으로 공개된 MRJ는 78석, 92석 두 종류의 중형 항공기(100인승 이하)로 ‘일본의 실지(失地) 회복 프로젝트’라는 현지 언론의 보도처럼 단순한 산업적 이벤트 이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9월 29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후쿠하라 유고(福原裕悟) 미쓰비시항공기 영업부장은 “MRJ는 미쓰비시그룹만이 아닌, 일본의 ‘국가 프로그램’으로 태어났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MRJ의 총개발비 1800억 엔(약 1조7000억 원) 중 500억 엔을 지원했고,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를 통해 기체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시험장을 제공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민간 부문에서도 도요타가 10%의 미쓰비시항공기 지분 투자에 나서면서 관련 기술을 제공하는 등 협업에 나섰다.

MRJ는 미군정의 항공기 제조활동 해금(解禁) 조치로 제작된 일본 최초 민간여객기 ‘YS11’의 1962년 첫 비행 이후 무려 반세기 만에 나온 자국산 비행기다. ‘잃어버린 20년’을 벗어나 부활하고 있는 일본 제조업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 기반에는 2012년 출범한 현 정부의 ‘아베노믹스’가 있다.

○ ‘소비 확대-투자 증가-수익 개선’ 선순환 구조

아베노믹스는 크게 ‘세 개의 화살’로 불리는 신성장전략, 통화 양적완화, 재정지출 확대로 구성됐다. 신성장전략에는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와 사업 재편 지원,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포함된다. 또 통화 양적완화를 통해 엔화 약세 효과를 이끌어내 수출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두 차례에 걸친 15조5000억 엔(약 145조7000억 원)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통해 소비 확대를 이끌면서 이를 다시 기업 수익 확대로 연결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본 기업들은 화려한 실적으로 정책의 효과를 입증했다. 현지 분석가들은 “도쿄증권거래소 1부(한국의 유가증권시장 격)에 상장된 기업들의 매출과 순이익이 올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간판 화학 기업인 도레이는 아베노믹스의 이러한 선순환 효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1999년 창사 이래 첫 적자에 빠지기도 했던 도레이는 자사 2015회계연도(2014년 4월∼2015년 3월)에 처음으로 매출 2조 엔을 넘겼다. 2016회계연도 상반기(2015년 4∼9월)에는 매출 1조286억 엔, 영업이익 751억 엔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8.5%, 46.4% 상승한 실적을 내면서 또 한 번의 기록 경신을 예고했다. 지난해 말 미국 보잉사와 1조3000억 엔(약 12조2200억 원) 규모의 탄소섬유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화려한 부활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이렇게 도레이가 부활할 기반을 마련해 준 곳은 따로 있다.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다. 2003년 도레이가 유니클로와 함께 개발한 특수소재 의류 ‘히트텍’은 경기 부양 정책으로 살아난 내수시장과 엔저 효과에 따른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세계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덕분에 탄소섬유 기술에 꾸준히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쓰무라 도시키(松村俊紀) 도레이 홍보과장은 “도레이는 미래 시장을 보고 오랜 시간에 걸쳐 투자를 해 기술력을 쌓았다”며 “아베노믹스로 인한 효과와 기술력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 “잃어버린 20년 다시는 겪지 않겠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극심한 장기 침체를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설비 투자 확대가 대표적이다. 호황일 때 투자를 대폭 늘려 경쟁력을 강화해 놓겠다는 것이다.

일본정책투자은행에 따르면 일본 제조기업들의 올해 전년 대비 설비 투자 증가율(연말 계획치 포함)은 1995년 이후 최대인 24.2%에 이른다. 최근 5년간(2010∼2014년) ―8.4∼3.7%에 머물렀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니다. 미쓰비시항공기는 1800억 엔을 들여 나고야에 비행기 생산공장을 새로 짓고, 도레이도 1000억 엔 규모의 탄소섬유 공장을 새로 세운다.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도 그 일환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R&D 투자 규모 설문에 응답한 기업 328개사 중 268곳이 지난해 계획한 R&D 투자 금액보다 약 4.7%를 늘리기로 했다. 또 111곳은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의 R&D 투자를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산업경쟁력강화법(원샷법) 개정과 법인세 인하 등 ‘기업 프렌들리’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아베 신조 정부가 2014년 1월 만든 원샷법에는 기업의 사업 재편이나 신사업 진출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돕는 각종 방안이 담겼다. 특정 기업의 사업에 대해서만 규제를 완화해주는 ‘기업실증특례’, 명확한 규제가 없는 사업의 적법성 여부를 빠르게 결론 내리는 ‘그레이존(grey zone) 해소’ 제도 등 다양하다. 가와구치 야스히로(川口恭弘) 일본 도시샤대 법학부 교수는 “일본 원샷법은 정부가 하나가 돼 규제 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유형의 법률”이라고 강조했다.

▼ 모든 규제 5년마다 재검토 의무화… 시간선택제 도입해 여성인력 활용 ▼

日정책 초점은 ‘기업 활력 유지’


아베노믹스 효과로 일본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되고 있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 등으로 상황이 급변할 가능성은 있다.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지금처럼 정권의 리더십이 강력하고 경기가 호황일 때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며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정책이 ‘규제 리뷰(review)’ 제도다. 이 제도로 내각부가 정부의 모든 규제를 5년마다 한 번씩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이를 통해 변화한 흐름에 비해 낡은 규제는 가차 없이 철폐해 산업의 활력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각부 규제개혁추진실 관계자는 “규제는 각 부처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만들지만, 자신이 만든 규제를 스스로 없애기는 어렵다”며 “이 때문에 범정부적 기구에서 규제를 정기적·객관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제도”라고 말했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 문제를 위한 노동개혁에도 나섰다. 일본 국립인구문제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일본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올해 7682만 명에서 2030년에는 6773만 명으로 15년 후에는 1000만 명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일하는 방식의 개혁과 여성 노동력 활용 확대 등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 해결책으로 아베 정부는 2013년 ‘한정정사원(限定正社員)’ 제도를 들고 나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중간 단계 고용 방식이다. 고용 기간이 정해지지 않고 기업이 직접 고용한다는 점에서는 정규직과 유사하다. 하지만 근무 시간이나 근무 지역이 제한적이다. 기업은 특정 시간에 업무가 몰리거나 일정한 지역에서만 필요한 일자리에 맞게 사람을 뽑아 쓸 수 있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근무지나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어 육아 등과 병행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고령화 때문에 불거질 수 있는 사회보장 재원 부족 문제에 대해선 의료·복지산업에 대한 큰 폭의 규제 완화로 대응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올해 6월 열린 규제개혁회의를 통해 ‘재생의료산업’에 대한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고 세포 배양 및 처리 과정의 아웃소싱을 허용하는 등의 방안을 확정했다. 또 일반의약품은 인터넷에서도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각종 치료에서 생활 지원까지 노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체계적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의료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하기로 했다.

도쿄=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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