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눈]비정을 이겨내야 비전이 있다

김영학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입력 2015-11-09 03:00 수정 2015-11-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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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소선(小善)은 대악(大惡)과 닮아 있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과 닮아 있다.’

2010년에 일본을 대표하는 최대 항공사 일본항공(JAL)의 파산 소식이 전해졌다. 망할 수도 없고, 망해서도 안 된다고 믿어온 일본 대표기업의 파산에 전 일본 열도가 술렁였지만 파산은 ‘예고된’ 비극이었다.

당시 JAL은 적자가 뻔히 예상돼도 지역별 이기주의와 정치 논리에 휘둘려 노선 조정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눈 덩이처럼 부채가 늘어나는 동안에도 퇴직한 승무원들을 위한 고액연금은 아무도 손대지 못했다.

변화를 위한 구원투수로 ‘살아 있는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교세라의 창립자 이나모리 가즈오가 나섰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JAL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취임한 그의 일성은 신선한 충격을 줬다.

“보수는 한 푼도 받지 않고, 딱 3년만 일하겠다.”

기득권을 가진 기존 경영진과 강성노조에 대한 설득 없이는 구조조정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한 이나모리 회장은 가장 먼저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이나모리 회장은 교세라를 세계적 소재기업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던 ‘아메바경영(부문별 독립채산제)’을 JAL에 전면적으로 도입했다. 관료처럼 행동했던 수만 명의 직원을 현장 중심의 세부 조직으로 나눴고, 매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채산성과 본인의 기여도를 확인하게 했다. 조종사들은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갖고 비행기에 올랐고, 공무원에 가깝던 스튜어디스들도 면세품 판매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격렬한 진통이 있었지만 직원들은 구조조정을 감내했고, 퇴직자들은 연금 인하에 합의했다. JAL의 변화는 과감하고 신속했다.

‘구제불능’의 적자기업이던 JAL은 1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2년째에는 법정관리를 벗어난 데 이어, 3년째에는 일본 증시에 재상장됐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주력산업의 경쟁 심화와 공급 과잉, 저유가와 세계적인 소비 위축 등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우리 기업에도 JAL의 부활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조선, 해운, 해외건설 등 ‘한국 경제의 기적’을 주도했던 주력산업의 위기는 정부 주도의 자금 투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재활과 극복의 의지가 없는 ‘환자’는 가족에게도 큰 짐이다.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와 자구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주인의식이 결여된 채 ‘채권단이 살려줄 것’이라는 타성에 젖어 있으면 임시방편 이상의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

정부와 정치권, 금융기관도 시장 논리의 작동을 전제로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산업정책을 통해 근본적인 해결을 도와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책금융기관 간 협조체계를 구축해 과감하고 선제적인 지원 로드맵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다. 지역 정서와 표심 눈치 보기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지원을 하면 국민 경제에 큰 짐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소선은 대악과 닮아 있고, 대선은 비정과 닮아 있다”는 이나모리 회장의 말은 오늘 한국 경제에 커다란 울림을 남긴다. 우리 산업의 경쟁력 회복과 체질 개선을 위해 ‘비정한’ 구조조정을 실천하고 이겨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와 경영진, 노동조합과 금융기관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경제에 비전이 있지 않을까.

김영학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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