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치영]정치 지도자가 가른 브라질의 국운

신치영 경제부 차장

입력 2015-10-06 03:00 수정 2015-10-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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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 차장
2010년 말 남미의 경제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매일 도심 곳곳에서 생활비 보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지는 아르헨티나와 출근길 도로를 가득 메우는 차량과 일자리로 향하는 근로자들로 활력이 넘치는 브라질의 대조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두 나라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규모 재정적자와 초인플레이션이라는 똑같은 위기 상황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90년대부터 두 나라는 다른 길을 갔다. 아르헨티나는 민심을 사기 위해 외국 빚을 끌어다가 퍼주기식 포퓰리즘 정책을 반복하다 재정이 파탄 났다. 반면 브라질은 부패 척결, 무역 자유화, 공기업 민영화, 내수 활성화 등으로 경제를 탄탄하게 성장시켰다.

특히 브라질에서는 퇴임을 앞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의 인기가 대단했다. 브라질에서 만난 사람들은 “룰라는 빈곤에서 허덕이던 우리를 세계 8대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린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사실 강성 노조 지도자 출신이던 그가 2003년 취임했을 때만 해도 외채 디폴트 선언, 기간산업 국유화 등 급진 좌파적 정책을 펼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재정 긴축, 외국인투자 세율 인하, 자본시장 개방 등 실용적 노선을 추구해 연평균 4%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때마침 급등하는 국제 원자재 가격도 그를 도왔다. 그가 퇴임하던 해인 2010년 브라질은 20년 만의 최고 수준인 7.6% 성장률을 보였다. 외환보유액은 10배로 늘었고 물가상승률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브라질 빈곤층의 비율이 30%에서 19%로 낮아지는 대신에 중산층의 비율은 42%에서 53%로 상승했다.

그러던 브라질 경제가 5년이 지나 다시 곤두박질치고 있다. 원자재 가격의 급락과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경기 침체에서 원인을 찾는 분석가가 많지만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무능과 무분별한 경제 운용의 탓이 더 크다. 수출 여건이 나빠지자 호세프는 중앙은행에 압력을 넣어 금리를 낮췄다. 소비자들이 대출을 받아 소비에 나서도록 유도한다는 취지였다. 그 결과 지금 중산층은 빚에 허덕이고 있다. 휘발유 가격과 전기요금을 통제해 에너지 공기업들은 경영 위기에 빠졌다. 대기업들이 저리로 대출을 받아 투자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국고를 동원했다.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재정 적자가 쌓이자 이를 숨기기 위해 국책은행들의 자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 모든 게 작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기 위해서였다. 재선에는 성공했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올해 성장률은 ―3%로 추락할 것으로 전망되고 물가는 두 자릿수로 치솟았다. 전문가들은 지금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브라질의 위기를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지난달 미국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브라질의 국가신용등급을 투기 등급으로 떨어뜨렸다. 무디스나 피치 중 한 곳만 더 브라질을 투기 등급으로 분류하면 외국인투자가들의 엑소더스가 벌어져 신흥국 전체로 위기가 확산될 수 있다. 선진국의 대형 연기금들은 2곳 이상의 신용평가사가 투기 등급으로 분류한 나라에는 투자하지 않는 관례가 있기 때문이다. 신흥국 위기가 심화된다면 한국도 피해 갈 수 없다.

브라질을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은 정치 지도자의 비전이 한 나라의 국운을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룰라의 브라질과 호세프의 브라질, 우리는 어느 쪽과 닮았나. 우리에게 이 답답한 경제상황에 돌파구를 열어 국운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지도자들이 과연 있는가. 자문해 볼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질문이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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