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손택균]‘칼질’에 상처받은 건 관람객이건만…

손택균기자

입력 2015-09-17 03:00 수정 2015-09-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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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균·문화부
“문제의 그림을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에서 즉시 철수하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직접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에게 사과할 방법을 찾겠다.”

리퍼트 대사에 대한 흉기 테러를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빗댄 그림을 내건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을 8일 동아일보가 단독 보도한 직후 미술관과 서울시가 차례로 황급히 내놓은 수습 방안이다.

한 주가 지났다. 서울시의 사과 약속은 애초 발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시 대변인은 16일 “시장이 아닌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명의의 비공식 유감 표명을 미 대사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내가 미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리퍼트 대사에게 유감 의사를 전달해 달라고 ‘담당 관계자’를 통해 당부했다. 대사에게 그 메시지가 전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정확히 무엇에 대해 사과한 것인지’ 물었다. 김 관장은 즉답을 피하며 반박하듯 슬쩍 말을 돌렸다. “나는 ‘사과’가 아니라 ‘유감’ 표시를 한 거다. 사과는 잘못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나는 예상하지 못한 물의가 빚어진 데 대해 유감의 뜻을 전했을 뿐”이라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한 주 전 첫 기사가 나가기 전날 통화에서 김 관장의 말은 사뭇 달랐다. 그는 “어떻게 그 그림을 자세히 봤느냐. 난처하다. 기자들 눈에 띄지 않은 채 조용히 전시가 끝나길 바랐다.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또 “개막 전에 그림을 보고 위험하다 싶었지만 작가와 작품 선정이 전시총감독 권한이라 내가 침해할 수 없었다”며 실무자인 총감독과 그를 임명한 외부 자문단에 슬며시 책임을 돌렸다. 그림을 전시실에서 철수한 뒤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림이 정치적 잣대에 의해 평가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걸까. 15일 새 기획전 간담회장에서 만난 김 관장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는 “좋은 취지의 행사가 동아일보 기사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상처받았다는 얘기도 들린다”고 말했다.

리퍼트 대사의 얼굴과 목을 칼로 찌른 김기종 씨는 11일 법원에서 살인미수 혐의가 인정돼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시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 미술관이 범죄자를 독립투사에 빗대고 테러를 옹호하는 투의 그림을 전시한 무책임한 행태가 모든 논란의 원인이었다. 표현의 자유, 보수나 진보의 정치적 잣대에 앞서 폭력행위에 대한 상식과 가치관의 문제인 것이다.

전화를 끊으며 김 관장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누구도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답변은 ‘정치적’이었다. “구조적 문제다. 관장이 딱 잘라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손택균·문화부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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