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약탈문화의 마지막 잔재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입력 2015-08-08 03:00 수정 2015-08-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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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이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에 짓고 있는 롯데 월드타워. 동아일보DB
의식하지 않고 지냈지만 생각해보니 롯데는 마치 자연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익숙한 환경이었다. 화려한 백화점이었고, 재미난 놀이공원이었고, 달콤한 캔디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반인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두 장년의 남자가 일본 말로 혹은 일본 악센트가 섞인 서투른 한국어로 구순의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비난하는 낯선 장면이 연출되었다. 롯데 제품의 무심한 소비자였던 국민은 이 친숙한 기업의 경영자들이 일본어 사용자라는 것에 우선 당혹감을 느꼈다. 더구나 두 형제가 서로 기업을 차지하겠다고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고는 그냥 어안이 벙벙해졌다. 상업과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이 선진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골목길 구멍가게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두고 피투성이의 싸움을 벌이는 맹수들과도 같았다. 더구나 가계도에서 살짝 드러난 전근대적 여성 소유 개념까지!!

작금의 롯데 사태는 계급의 기원인 약탈문화를 상기시킨다. 먼 옛날 인류가 아직 사회를 구성하기 전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동작의 남성들은 정기적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또는 전쟁을 통해 다른 집단의 재화를 약탈했다. 이들은 생산적인 노동이 아니라 강제로 물건을 빼앗는 약탈 행위를 통해 자산을 획득했다. 약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재화를 획득하는 일은 그들에게는 몹시 하찮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반면에 그럴 능력이 없는 나머지 남자들과 모든 여자들은 근면한 일상적 노동을 통해 생활필수품을 생산했다. 이처럼 손으로 직접 물건을 생산하거나 남에게 용역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천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약탈 행위는 명예로운 일이고 생산적인 노동은 천한 일이었다. 생산노동에서 면제된 상류층과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하류층이라는 두 개의 계급이 분화되는 순간이었다. 약탈문화에서는 여자도 하나의 재산 품목이었다. 전리품인 여자를 적으로부터 강탈하는 관행은 소유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관례를 낳았다. 여자는 하나의 소유품으로서 남성에게 종속되었고 남성의 보호와 감독을 받았다. 오늘날 한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는 그 사회의 문화 수준을 명시하는 확실한 지표라고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말했는데, 그 인류학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차츰 인류가 문명화되면서, 그리고 몇 번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약탈 기질이 더이상 현대 생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산노동의 개념도 바뀌어서 육체노동만이 아니라 정신노동도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었다. 따라서 생산적 직업은 더이상 천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상류층에 대한 이미지도 바뀌었다. 놀고먹기만 하는 유한계급이 아니라 더 바쁘게 일하는 생산자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실체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해지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기업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막대한 홍보 경비를 지출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에 롯데가의 후계자들은 매출 95%를 내는 아버지 나라의 언어조차 배우지 않았다. 그들의 오만한 사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시대적이다. 소비자의 사소한 심리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현대적 트렌드마저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례가 약탈문화의 마지막 잔재이기를 바랄 뿐이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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