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윤홍근 제너시스 BBQ회장의 ‘치킨대학’

동아일보

입력 2014-06-07 03:00 수정 2014-06-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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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를 넘겠다는 꿈… 연구실 튀김냄새가 꽃향기 같아”

윤홍근 제너시스 BBQ회장(59)은 도무지 겁이 없다. 그는 1995년 창업할 때부터 세계 공룡기업 맥도널드사와 한판 붙어보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 푸하하. 그게 가당키나 한가.

맥도널드는 전 세계 패스트푸드 시장 점유율 40%, 하루 5000만 개 햄버거를 파는 회사다. 한해 400억 달러를 벌어들이며, 120여 개국에 3만 개의 프랜차이즈를 가진 문어발 공룡기업이다. 오죽하면 ‘빅맥지수(각국 빅맥값으로 그 나라의 구매력과 통화가치 평가)’까지 생겼을까.

“두고 봐라. 머지않아 ‘BBQ지수’가 나올 것이다. 2020년이면 한국토종브랜드 BBQ치킨이 세계일등 프랜차이즈가 될 것이다. 맥도널드는 골리앗이지만, 우린 작고 단단한 다윗이다. 다윗 손엔 물맷돌 5개가 들려있었다. 우리 BBQ 손에도 ‘바삭바삭 고소한 감칠맛의 치킨’이 있다. 난 창업 5년 만에 치킨대학을 세웠다. 그건 맥도널드의 햄버거대학을 본뜬 것이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다. 가맹점이 1000개를 돌파하는 데 맥도널드는 14년 걸렸지만, 우린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맥도널드가 15년 만에 세계시장에 진출했지만, 우린 고작 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2014년 5월 현재 우리 BBQ는 가맹점 국내 1800개, 해외 57개국(중국, 미국, 인도, 브라질 등) 350여 개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밑바닥을 굳게 다지는 시기일 뿐이다.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이제 막 씨를 뿌렸다고나 할까. 일단 한번 불이 붙으면, 빈 들의 마른 풀처럼 활활 타올라 순식간에 지구촌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칭기즈칸의 몽골 기병처럼 ‘치킨로드’를 타고 바람같이 달려갈 것이다. 2020년 전 세계 5만 개 가맹점에 매출 50조, 로열티 연 1조 원 달성은 결코 꿈이 아니다. 맥도널드를 물리치는 데 그 첨병은 단연 치킨대학이다. 경기 이천시 마장면 설봉산 기슭 8만여 평(26만4000m²)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모든 신무기가 나온다. 치킨대학의 끊임없는 음식개발과 사원 및 가맹점주교육은 BBQ의 뇌와 심장이나 마찬가지다. 나의 꿈과 사업정신이 오롯이 담긴 곳이다.”

윤홍근은 원래 창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1984년 미원그룹(현 대상그룹)에 입사할 때, 그의 꿈은 미원그룹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늘 ‘최고경영자의 눈’으로 없는 일도 만들어서 했다. 위에서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은 뭔가 직무유기 같아서 못 견뎌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새바람이 불었다. 매출액도 2∼3배씩 솟구쳤다. 당연히 과장(6년), 부장 승진(4년)도 초고속으로 내달았다.

그가 미원자회사 마니커 신규사업본부장을 맡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마니커는 닭고기가공 유통회사였는데, 닭고기수요가 점점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뭔가 돌파구가 절실했다. 윤홍근은 소형 치킨전문점으로 그 탈출구를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회사의 입장은 달랐다. 10∼15평 정도의 소형치킨점보다는 맥도널드나 KFC 같은 대형점포를 원했다. 미원그룹 같은 대기업이 골목상권에 뛰어들면 그룹이미지에 좋지 않다는 거였다. 또한 대한민국에만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가 200개가 넘을 정도로 소형점은 이미 포화상태라는 이유였다.

“맞다. 1994년 당시 소형치킨점은 보기에 따라 만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닭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계층은 어린이와 주부였다. 그런데도 소형치킨점은 술집을 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족단위로 가기엔 무리였다. 난 기존 치킨집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결국 창업을 결심했다.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절박했다. 내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원의 자회사 형태로 출발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비록 사업자금은 모두 내가 맡고, 미원이나 마니커라는 이름을 쓸 수는 없었지만, 미원의 인프라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미원중앙연구소에서 20여 종류의 치킨상품을 개발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BBQ상표권은 ‘마니커가 없어지거나 매각되면 나에게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미원소유로 했다. 사실 사업에 성공하면 보란 듯이 친정 미원에 돌아가고도 싶었다. 어쨌든 3년쯤 지나 마니커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BBQ상표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윤홍근은 파평 윤씨 종가의 1000섬 지주집안 종손(2남 2녀)이었다. 순천 풍덕동 하풍리 섬진강하류에 100여 가구가 10대에 걸쳐 살았다. 오늘날 그가 살던 집과 동네는 순천정원박람회장이 돼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등잔불로 공부했을 정도로 외딴 곳이었다.

“난 증조부 조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증조모, 조모, 어머님 손에서 자랐다. 여수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쯤 오셨는데, 내가 대입준비 할 때 돌아가셨다. 난 집안에서 종손이라고 어른대접을 받았다. 어머님은 나와 평생 겸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요즘도 내가 먹은 뒤에야 식사를 하신다. 할머니도 나를 거의 못 안아봤다. 나는 늘 증조모와 겸상으로 밥을 먹었다. 어머님은 맛있고 귀한 음식은 나에게만 먹였다. 누님과 여동생은 참기름도 제대로 못 얻어먹었다. 1968년 나에게 먹이려고 무쇠솥에 짚불로 ‘왈순마 라면’ 한 봉지를 끓여내시던 어머님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에 라면은 아주 귀한 음식이었다. 어머님은 얼마나 먹고 싶으셨을까. 난 어머님이 이 세상 최고의 요리박사라고 생각한다. 무슨 음식이든 한번 맛보면 그대로 만들어내는 음식천재시다. 나의 ‘절대 식감’은 순전히 어머님 덕분일 것이다. 그런 어머님(82)이 칠순을 넘으시면서부터 제대로 맛을 못 내신다. 가슴이 아프다.”

윤홍근의 집안은 아버지가 눈을 감으면서부터 풍비박산이 났다. 그 많던 땅도 모두 날아갔다. 윤홍근이 대학에 갈 돈도 없었다. 그러자 정점수라는 친구가 나섰다. “내가 하숙비를 대줄 테니 대학에 가라. 난 진즉부터 사업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그는 광주에 가서 조선대 원서까지 사와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소금보다 귀한 동무였다. 그렇게 윤홍근은 조선대 무역학과에 장학생으로 들어갔고, 땀과 눈물로 4년 뒤 전체 수석졸업을 이뤄냈다.

졸업 후 학사장교 1기로 군대생활(3년)을 한 것도 큰 경험이었다. 그는 강원 인제 원통 천도리의 12사단 소대장으로서 병사들과 형제처럼 뒹굴었다. 장교숙소가 아니라 내무반에서 소대원들과 함께 잤다. 같이 라면을 끓여먹고, 울고 웃었다. 그 일대 학사장교 동기회장도 맡았다. 동기들이 ‘천도리 군단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사람 사는데 ‘정’과 ‘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군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난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간다. 직원이 타계하면 그 자녀들 대학등록금까지 책임진다. 10년 이상의 가맹점주들도 마찬가지다. BBQ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맛 즉 ‘Best of Best Quality’의 약자다. 그것은 바로 믿음에서 나온다. 왜 사업경영을 하는가. 여러 사람이 고루 편하고 잘살게 하려는 것 아닌가. 1997년 IMF 사태, 1998년 태풍 애니, 2003년 조류독감…. 수많은 고비를 뚫고 여기까지 왔다. 나 혼자 살려고 하면 안 된다. 가맹점이 살아야 본사가 산다. 고객이 원하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윤홍근은 한마디로 ‘닭사마’다. 태몽도 어머님 치마폭에 봉황 같은 닭이 덥석 안기는 꿈이었다. 닭무늬 넥타이핀에 닭무늬 넥타이 차림. 30여 개 나라에서 모은 5000여 점의 닭모형이 그를 감싸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난 치킨을 파는 게 아니라, 브랜드와 경영노하우를 판다.”  


▼ 시식 한번에 40∼60조각… 식감 알기위해 생닭도 먹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을 찾아서


윤홍근은 ‘맛의 편집광’이다. 닭고기 요리로 ‘소문난 집’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직접 먹고 또 먹어본다. 진주의 유명 닭찜집은 20번도 넘게 발품을 팔았다. 바비큐 메뉴를 개발할 땐 전국의 300여 치킨집을 찾아가 직접 맛보았다. 일본 오사카 한 흑돈카레식당은 30번이나 갔는데도 아직 맛의 주인과 레시피를 찾지 못하고 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원주인의 행적이 묘연하다.

보통 한번 시식할 때 먹는 닭고기는 40∼60조각. 한번에 무려 5∼7마리를 먹는 셈이다. 양이 많아 토하고 다시 먹을 수밖에 없다. 소화제는 여행 필수품 1호. 요즘도 반드시 하루 한 끼는 닭고기를 먹는다. 이삼일 내리 닭고기만 먹는 날도 흔하다. 신선한 육질의 식감을 알기 위해 생닭까지 먹었다면 할말 다했다.

“생고무 씹는 맛이 그럴까. 물컹하고 미끈둥하고 속이 울렁울렁하고…. 난 비위가 몹시 약하다. 생선회도 비린내가 나서 먹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명색이 치킨사업을 한다면서, 내가 생닭의 그 식감을 모른다면 말이 되는가. 요즘엔 생닭 먹는 일이 전혀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우리 치킨대학연구소 주상집 원장 같은 분은 수백 번도 넘게 생닭 맛을 본 사람이다. 그는 술도 마실 수 없고, 담배도 피울 수 없다. 연구원은 금연, 금주가 원칙이다. 술과 담배로 그들의 식감이 떨어지면 큰일 난다. 올리브치킨을 개발할 땐 전 연구원이 6개월 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난 ‘음식 맛의 99.9%는 사람이 노력하면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0.1%는 목숨 걸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보통 99.9%의 맛을 냈을 경우, 무작위 고객 100∼200명 정도 테스트를 해보면 반응이 신통치 않다. ‘그냥 그저 그렇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사원이 혼신을 다해 나머지 0.1%의 맛을 찾아낸 후엔 다르다. 고객 1000명을 대상으로 20∼30회 테스트를 해보면 드디어 ‘정말, 맛있어요!’라는 말이 나온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정말 행복하다. 난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킨’을 꿈꾼다. 튀긴 닭 냄새가 꽃향기보다 좋다. 여태까지 내 경험으로 보면 맛있는 치킨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냉동닭은 맛이 떨어진다. ‘맛의 핵심’ 육즙이 얼음이 되기 때문이다. 얼음은 닭고기의 조직을 파괴할뿐더러, 녹을 때 육즙과 함께 스르르 새어나간다. 보통 수입닭고기는 냉동닭이 대부분이다. 국산닭고기가 육질이 단단하고 신선하다. 닭고기는 잡은 후 24∼48시간 이내에 요리해 먹는 게 가장 맛있다.

2.무게 950∼1050g의 닭이 가장 맛있고 육질이 좋다. 보통 32∼35일 정도 키운 닭이다. 냉동수입닭고기 중엔 500∼600g짜리도 많다. 1kg 안팎의 건강닭고기는 전체유통의 30% 정도에 불과하다.

3.닭고기는 가공 후 12시간 이내에 배송을 마쳐야 한다. 냉장차 온도는 2℃. 수십 마리씩 플라스틱상자에 담아 나르면 편리하고 비용이 절감되겠지만 닭고기 표면이 마르거나 손상될 수 있다. 먹기 좋게 조각을 낸 뒤, 한 마리 단위로 개별포장해서 냉장 배송해야 한다. 개별포장하면 닭 육즙이 마르지 않고 위생적이다.

4.닭고기가 가맹점에 도착하면 맨 먼저 양념을 바른다. 사람이 가장 맛있게 느끼는 양념의 염도는 0.9∼1.0%. 손으로 한 조각 한 조각 정성껏 양념을 발라야 속살 깊숙이 맛과 향이 스며든다. 그 다음 비닐포장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 12시간 이상 숙성한다. 조리는 손님의 주문을 받은 후에 시작한다.

5.닭고기(1kg)를 165℃ 올리브유에서 10분간 튀긴 후(몸통중심 90℃), 20∼30분쯤 지나 먹는 치킨이 가장 맛있다. 치킨속살의 온도가 60∼65℃일 때가 딱이다. 배달시간이 30분을 넘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6.튀김옷은 치킨의 ‘패션’이다. 먹음직스러운 색과 고소한 향, 그리고 바삭바삭한 식감과 소리가 나야 좋다. 베이비파우더만큼 부드럽고, 수분함량 10% 이하가 안성맞춤이다.

“난 맛을 볼 때 우선 코로 냄새부터 맡는다. 향긋하고 달콤한가, 아니면 비리고 느끼한가.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 다음 눈으로 본다. 보기 좋은 것이 맛도 좋다. 눈 내리는 밤, 창호지에 비친 모과불빛 같은 치킨을 보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 마지막으로 입에 넣어 혀로 맛을 본다. 천천히 씹고 또 씹는다. 살살 녹는가, 고소한가 아니면 퍽퍽한가. 혀에 새기고 머리에 넣는다. 서울 문정동 제너시스 본사 1층 직영점에는 조리실이 있다. 가맹점을 관리하는 슈퍼바이저들이 매일 교대로 이곳에서 한 종류씩 조리를 한다. 그 요리는 내가 반드시 시식해본다. 제너시스의 모든 직원은 입사와 동시에 의무적으로 조리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 맛에 관한 한 양보하지 않는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2005년 올리브치킨을 내놓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올리브유는 보통 식물성기름보다 7배 이상 비싸다. 그것도 우리는 최고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쓴다. 임직원들과 가맹점사장들이 거세게 반대했지만 밀어붙였다. 고객들이 튀기는 기름이 ‘찜찜하고 불안하다’는 데 왜 망설이겠는가. 과연 올리브유는 ‘신이 내린 최고의 식품’이었다. 반응이 뜨거웠다. 나의 선택이 옳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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