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로비 때마다 등장하는 명품시계의 세계

동아일보

입력 2013-08-24 03:00 수정 2013-08-24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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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하나가 집 한 채 값… ‘신분과시욕’을 손목에 찬다

김구라 씨는 인기 있는 방송인이지만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제법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경기 김포시에 산다. 휴대전화도 구시대의 유물인 ‘2G폰’을 쓴다. 그런 김 씨도 뿌리치지 못하는 사치품이 있다. 바로 남성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는 명품시계다. 짠돌이 이미지가 강한 김 씨도 방송에서 종종 자신이 찬 IWC 시계를 가리키며 “나 이만큼 성공했다”고 과시한다. IWC는 145년의 전통을 가진 스위스 명품시계 브랜드로 최저 가격이 500만 원대일 만큼 고가 제품이다.

원래 명품시계는 결혼 예물용으로나 쓰였다. 알 만한 브랜드는 롤렉스와 오메가, 카르티에 등에 국한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파테크 필리프, 오드마르 피게, 바슈롱 콩스탕탱, IWC, 브레게, 블랑팽, 예거 르쿨트르(이상 스위스), 파네라이(이탈리아) 등 다양한 명품 브랜드들이 이름을 알리면서 이제 서울 강남 일대에선 수백만∼수천만 원, 심지어는 억대의 초고가 시계를 차고 다니는 이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기업인의 정관계 로비 사건에도 명품시계는 단골 아이템이다.


웬만한 집 한 채 값인 명품시계


20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 2층에 위치한 명품시계관. 수십만∼수백만 원짜리 시계들은 여러 브랜드가 한곳에 모인 편집매장에 전시되는 반면 수천만∼수억 원짜리 최고급 시계를 취급하는 브랜드 매장은 대부분 단독 매장인 ‘부티크’ 형태로 차려져 있다.

스위스 브랜드인 ‘로제 뒤뷔’ 매장으로 들어가 제일 비싼 시계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검은 가죽 끈에 속이 고스란히 비치는 시계를 내놨다. ‘엑스칼리버 더블플라잉 투르비용 스켈리턴’이라는 이름의 시계로 전 세계에서 88개만 한정 생산됐다고 했다. 시계 곳곳에는 다이아몬드 4.77캐럿이 628개로 쪼개져 박혀 있었다. 가격은 3억9300만 원. 웬만한 집 한 채 값이다.

명품시계는 대부분 손목의 운동에서 힘을 얻어 스스로 움직이는 오토매틱 와인딩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동력장치인 기계식 무브먼트의 기술력에 따라 가치가 좌우된다. 그래서 수은전지를 사용하지 않고 자체적인 무브먼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브랜드만이 명품 대우를 받는다. 기계식 시계의 특성상 부품들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는 오차를 최소화하는 ‘투르비용(Tourbillion)’이나 정기적인 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미닛리피터(Minute Repeater)’ 등의 기능까지 더해진 시계는 가격이 수억∼수십억 원에 이른다.

돈이 있어도 아무나 못 사는 명품시계도 있다. ‘시계의 제왕’이라는 파테크 필리프는 일부 특정 모델에 대해서는 고객에게 ‘시계 구매 이력’을 적은 에세이를 받아 검토한 뒤 판매 여부를 결정한다. 특히 고급 기능인 미닛리피터가 포함된 제품은 에세이를 내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에세이에는 자신이 구매한 파테크 필리프 제품 명세와 개인의 인생 약력을 담아야 한다. 에세이를 통과하려면 보통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10개 이상 산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파테크 필리프를 수입하는 김윤호 우림FMG 대표는 “올해 초 한 손님이 5억 원 상당의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사려고 에세이를 냈다가 본사로부터 판매를 거절당했다”며 “좋은 시계를 사려면 시계 커리어도 단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엔 여성용 명품시계 수요도 늘고 있다. 로제 뒤뷔 현대백화점 매장은 지난달 19일 문을 열고 일주일 만에 1억200만 원짜리와 5700만 원짜리 시계 두 개를 판매했는데 둘 다 여성용이었다. 이정환 현대백화점 바이어는 “여성의 명품시계 구매 비율이 5년 전만 해도 10%에 못 미쳤는데 최근엔 30%에 이른다”며 “대부분의 명품시계 브랜드들이 여성 고객을 위한 시계를 공격적으로 출시하며 여심(女心) 공략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불황 속 ‘부익부 빈익빈’의 상징


최근 국내 명품시계 시장은 기존의 인기 브랜드였던 롤렉스와 오메가, 카르티에 등이 꾸준한 강세를 보이면서도 다양한 브랜드들이 새롭게 인기를 끌면서 시장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국내 명품시계 시장은 경제 불황이 본격화된 2009년부터 급속히 커지기 시작해 올해까지 매년 20∼30%씩 성장하고 있다. 불황일수록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 2008년까지만 해도 스위스 시계 브랜드 500여 개의 모임인 스위스시계산업협회가 매년 공개하는 ‘스위스 시계 판매액 15위권 국가 순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2009년 판매액 2억2300만 스위스프랑(약 2174억 원)으로 처음 13위에 올랐다. 이해에는 한국을 제외한 1∼15위 국가 모두 전년 대비 판매액이 13∼39% 감소했지만 한국만 유일하게 35.7% 상승했다.

한국의 스위스 시계 브랜드 판매액 순위는 2011년 11위(3억9450만 스위스프랑·약 4800억 원)로 두 단계 뛰어올랐다. 한국은 올해 상반기에만 2억3770만 프랑(약 2892억 원·11위)어치의 스위스 시계를 사들여 이미 2009년 한 해 판매액을 넘어섰다.

불황에 민감하다는 출판물 광고에서도 시계 광고만큼은 강세를 보이고 있다. 고급 남성패션잡지 GQ코리아에 따르면 2008년 전체 지면광고의 7.6%에 불과했던 시계 광고는 2013년 8월 말 현재 전체 광고의 13.0%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명품시계라고 무조건 잘 팔리는 건 아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뇌물 용도로 구매했던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된 시계 브랜드 프랭크뮬러는 국내에 다수의 정식매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최근엔 면세점을 제외하곤 한 곳의 정식매장만 남아있다. 한 시계업계 관계자는 “프랭크뮬러는 변화에 다소 소극적이었다. 국내 명품시계 소비자는 해외 소비자와 달리 유행에 민감한 편이라 제품에 지속적인 변화를 줘야 살아남을 수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뇌물과 재테크 수단으로도 인기


서울 중구 남대문로 힐튼호텔 내 ‘프랭크뮬러’ 매장.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수천만 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초고가 명품시계는 정관계를 강타하는 로비사건 때마다 꾸준하게 등장했다. 프러포즈 때 다이아몬드 반지에 장미꽃다발을 곁들이듯 거액의 현금을 뇌물로 건넬 때 명품시계도 필수품처럼 따라붙는 게 최근 몇 년간 불거진 로비사건의 특징이다.

이재현 회장은 2006년 전군표 당시 국세청장에게 30만 달러(약 3억3500만 원)를 뇌물로 주면서 4200만 원짜리 프랭크뮬러 시계도 건넨 것으로 최근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이 회장은 허병익 당시 국세청 법인납세국장에게도 2700만 원 상당의 프랭크뮬러 시계를 줬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에 600만 달러(약 67억 원)를 전달함과 동시에 2006년 9월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각각 1억 원 상당의 피아제 시계 두 개를 건넨 것으로 밝혀져 당시 피아제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국철 SLS그룹 회장은 정관계 인사들에게 거액을 로비하면서 카르티에 시계 2개, 오메가 시계와 프랭크뮬러 시계 각 1개 등 명품시계 4개를 건넸다고 주장한 비망록을 2011년 공개하기도 했다.

명품시계는 현금으로 결제하면 추적을 피하기 쉽고 휴대가 간편해 운반도 쉽다. 이재현 회장도 서울 중구 남대문로 힐튼호텔 내 프랭크뮬러 매장에서 직접 시계 두 개를 고른 뒤 현금 결제했다. 이 과정에서 15%가량 할인도 받아 4200만 원짜리 시계를 3570만 원에, 2700만 원짜리 시계를 2346만 원에 구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데다 일부 모델은 중고임에도 되레 가격이 뛰는 점도 명품시계 시장의 특징이다. 매해 수천∼수만 개만 생산해 희소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24년째 시계를 수입해온 김윤호 대표는 “파테크 필리프 월드타임 5131은 정가가 8920만 원인데 물량 부족으로 해외 인터넷 중고시장에선 중고가 1억8000만 원에 팔리고 있다”며 “만약 계기판의 숫자가 잘못 박히거나 삐뚤어진 명품시계가 있다면 경매에서 원가보다 몇 배 높게 팔릴 것이 확실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명품시계는 희소성이 가치를 좌우한다”고 말했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A 씨(43)는 시계 재테크로 해마다 500만 원 정도 부가수익을 올린다. 원하는 시계를 사서 차고 다니다가 되파는데도 대부분 구매가보다 높은 가격을 받고 판다. 최근 3년 동안 A 씨의 손목을 거쳐 간 명품시계는 30개가 넘는다. A 씨는 외국에 가면 시계를 사서 차고 들어오곤 한다. 그러곤 수개월 정도 여러 시계를 바꿔 차고 다니다가 인터넷 중고시장에서 되파는데 열에 아홉은 남는 장사를 한다고 한다.

해외 온라인 중고마켓도 A 씨의 주요 수익원이다. A 씨는 환율이 요동칠 때마다 해외 중고물품 거래사이트인 이베이를 수시로 접속한다. 환율 변화에 따라 시계를 사거나 팔면 손쉽게 차익을 거둘 수 있다. A 씨는 “나도 처음엔 1000만 원 넘는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번 발을 들인 이후 이제 명품시계는 내 삶의 일부가 됐다”고 말했다.

공짜 기념품 손목시계, 1만∼2만 원짜리 시계도 시간 잘 맞고 모양 멋진데, 왜 일부 남성들은 손목에 수백만∼수억 원의 고가품을 차지 못해 아우성인 걸까. 시간 자체로만 보면 수은전지로 돌아가는 전자시계가 가장 정확하지만 명품시계 마니아는 손목의 운동을 통해 얻어지는 힘만으로 정확한 시간과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는 기술력을 가진 시계에 열광한다. 그만큼 시계 기술이 고차원적이라 이를 예술로 여기기 때문. 초고가 명품시계 브랜드의 국내 수입권을 따낸 한 딜러는 “예술품을 다룰 수 있어 영광이다. 갤러리를 운영한다는 마음으로 시계를 팔겠다”고 말했다.

명품가방이 철저하게 여성의 자기만족과 신분 과시를 위한 상품이라면 명품시계는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는 ‘페로몬 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취업 2년차인 은행원 김모 씨(28)는 최근 50만 원대 티소 시계에서 200만 원대 태그호이어로 갈아타면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나이트클럽에 가서는 긴 셔츠 소매 끝자락에 드러나는 시계를 맞은편 여성이 알아봐 주길 갈망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명품시계 브랜드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아본다는 롤렉스와 오메가, 카르티에인 것도 이런 영향이 없지 않다. 재테크를 목적으로 시계를 취급하는 이들도 주로 이런 브랜드를 거래 대상으로 삼는다.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바이어는 “해외에선 훌륭한 기술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판매가 저조한 해외 명품시계 브랜드가 의외로 많다”며 “시계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대중의 안목이 아직은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조동주·김수연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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