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금융 무엇이 문제인가]<上>MB정부 5년 난맥상

동아일보

입력 2013-03-04 03:00 수정 2013-03-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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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한다며 ‘트럭깡’… 운영비 빌려 가게 확장… 줄줄 샌 서민금융

《 박근혜 대통령은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국민행복기금을 통한 서민의 금융 지원정책을 추진 중이다. 지난 정부도 가계 빚에 시달리는 서민을 위해 각종 지원책을 내놓았다. 새희망홀씨, 미소금융, 햇살론, 바꿔드림론…. 5년간 100만여 건을 지원해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각종 제도가 난립해 서민들의 혼란을 부추겼고 일부에서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기존 제도를 정비하지 않은 채 새로운 서민금융제도를 도입하면 혼란만 가중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기존 서민금융제도의 현황과 문제점을 3회에 걸쳐 해부한다. 》

# 최근 A미소금융재단의 문을 두드린 김모 씨(43). 그는 중고트럭을 장만해 채소를 팔겠다는 사업계획을 재단의 여신 담당자에게 밝혔다. 미소금융재단은 저소득층의 자립을 위해 창업자금과 운영자금을 연 2∼4.5%의 낮은 금리로 빌려준다.

재단은 김 씨의 자립을 지원하기로 하고, 중고차 매매업자에게 트럭대금 800만 원을 송금했다. 차량 명의는 즉시 김 씨에게 이전됐지만 그날 오후 김 씨는 연락이 끊겼다. 재단이 알아보니 김 씨는 트럭을 팔아 현금을 챙기고 잠적했다. 이른바 ‘트럭깡’을 한 것이다. 결국 미소금융 측은 이 지원금을 부실처리했다.

# 전모 씨(25)는 아버지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새희망홀씨 대출을 신청했다가 ‘임시직’에 발목이 잡혔다. 이 대출을 받으려면 최근 3개월 이상 근로소득이 있어야 했다. 그는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일한 지 2개월 됐다”며 “청년 실업자 상당수가 한두 달씩 임시직을 전전하는데 서민금융에서도 소외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아버지 병원비를 구하지 못했다.

채소 행상을 하겠다던 김 씨는 서민금융을 지원해선 안 될 사람이었고, 임시직 전 씨는 생계자금 지원이 꼭 필요했다. 이처럼 서민금융에 11조 원이라는 자금이 투입됐지만 필요한 곳에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의문이다. 한쪽에선 ‘지원금=눈먼 돈’으로 간주돼 모럴해저드가 나타나고, 다른 한쪽에선 정작 돈이 필요한 서민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 모럴해저드가 ‘독(毒)’인 서민금융

3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서민금융 4종 세트에 속하는 미소금융과 햇살론, 새희망홀씨, 바꿔드림론은 모두 1년 만에 연체율이 두 배가량으로 뛰었다.

햇살론의 연체율은 2011년 말 4.8%에서 지난해 말 9.9%로 급등했고, 바꿔드림론은 같은 기간 5.9%에서 9.1%로 뛰어올랐다.

전문가들은 “서민금융이 제대로 정착하려면 기존의 대출 시스템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창구에서 돈만 지원해주면 끝’이라는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서민금융의 창업자금 지원이 경쟁력이 낮은 영세 자영업종 위주로 이뤄져 자영업의 부실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대출 지원자에 대한 소득 감소와 서민금융 부실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B미소금융재단에 찾아온 서모 씨(43)는 식당을 운영하겠다며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아내, 장모와 함께 식당을 운영해 인건비 부담을 줄일 테니, 자금만 보내주면 제대로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다. 재단 측은 인건비를 아끼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해 식재료 등을 구매하는 운영자금 명목으로 2000만 원을 빌려줬다.

하지만 그는 이 돈을 가게를 넓히는 데 썼다. 심지어 그는 종업원 3명을 추가로 고용했다. 대출 규정상 대출 목적에 맞게 돈을 써야 하지만 사업체의 ‘덩치 키우기’에 돈을 쓴 것이다.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그는 결국 연체했고, 현재 폐업 직전에 이르렀다.

박병원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은 “서민금융 제도로 소액신용대출이 쉬워지면서 서민들이 쉽게 돈을 빌려 레드오션이 되어버린 자영업에 뛰어들고 있다”며 “이는 기금 부실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대출자 본인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심지어 지원 주체들 사이에서도 모럴해저드가 빚어진다. 저축은행과 신용협동조합 등이 연 10% 안팎의 낮은 금리로 소액 대출을 해주는 햇살론이 대표적이다. 대출액의 95%가 지역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이 되기 때문에 돈을 떼여 대출을 해주는 회사는 5%의 손실만 본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대출할 곳이 마땅치 않은 저축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대출에 나서면서 햇살론 부실도 치솟고 있다”며 “이는 곧 보증기관의 부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햇살론의 연체율이 1년 사이 두 배로 급등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 까다로운 요건에 발목 잡힌 서민들


지원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해 대출창구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리는 서민들도 적지 않다. 경기 불황의 장기화로 아르바이트와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소득 감소 등으로 빚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대부분이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지 않아서 ‘3개월 이상 근로 소득’ 요건을 맞추기가 힘들다. 이들이 정작 새희망홀씨나 햇살론을 이용하기 힘든 셈이다.

자영업자들에게도 여러 벽이 있다. 고철을 재활용해 금속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는 한모 씨(45)는 햇살론 대출을 받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신용보증기금이 보증하는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납부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원칙적으로 신보나 기보의 보증 채무를 지고 있는 사람은 이미 대출 지원을 받은 것으로 여겨져 햇살론을 이용할 수가 없다. 자영업자들은 보증기관의 보증을 자주 이용하지만, 이런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로 자격 요건이 제한된 셈이다.

이런 이유로 새희망홀씨나 햇살론 대출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 대출 혜택을 받는 사람은 10명 중 3, 4명에 그친다.

현재 연체한 채무가 있거나 과거 연체 기록이 있어도 대출은 힘들다. 시중은행 지점에서 새희망홀씨 대출 상담을 하는 직원은 “연체 채무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도 상당수”라고 전했다.

연 20% 이상의 이자를 낼 정도로 신용도가 낮거나 절박한 사람이라면 연체 없이 원리금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제2금융권과 대부업체까지 전전했다면 신용등급은 더욱 낮아지고 대출 가능액도 감소한다.

신용등급이 높아서도 안 된다. 한 상담원은 “드물지만 카드를 단시간에 많이 발급받는 방법으로 일부러 신용등급을 떨어뜨리기도 한다”며 “서민금융을 지원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등급을 낮추는 일종의 편법”이라고 전했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경제학)는 “현재 서민금융상품이라 불리는 것들은 금융소외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이용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품”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금융회사들은 최대한 금리를 낮춘 게 그 정도일 텐데 금융소외자들은 그것마저도 벅차다”고 말했다.

김유영·장원재·한우신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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