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홍석민]미니와 프라이드

동아일보

입력 2012-11-20 03:00 수정 2012-11-2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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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민 산업부 차장
은발에 커다란 안경을 낀 모습이 전형적인 과학자 느낌이었다. 1998년 가을 스위스 제네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만난 크리스 스미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70). 14년 전의 일이지만 기억이 또렷한 이유는 당시 CERN 소장이던 그가 직접 연구소를 안내해 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CERN이 어떤 곳인가. 1954년 설립된 CERN은 미국 페르미연구소와 함께 입자물리학 분야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연구소다. 올해만 해도 새로운 입자 ‘힉스(Higgs)’ 발견,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 논란 등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의도만 한 넓이에 113개국 600여 개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온 1만여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모여 있다. 세계인이 쓰는 월드와이드웹(WWW)도 이곳에서 처음 개발했다. 그런 곳의 최고 책임자가 안내를 자청한 것이다.

다소 들뜬 마음으로 주차장에 내려왔을 때 깜짝 놀랐다. 주차장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사가 딸린 고급 대형차가 아니라 20년쯤 돼 보이는 소형차 미니였다. 영국 코미디물인 ‘미스터 빈’에서 주인공이 타던 바로 그 차. 다른 일행을 조수석에 앉히기 위해 뒷자리로 들어갔다. 차가 작아서 앞좌석을 앞으로 민 다음 몸을 옆으로 요령껏 집어넣어야 했다. 자리는 다리를 다 뻗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하지만 차에 앉아 연구소 곳곳을 다니면서 가슴속엔 불만 대신 흐뭇함이 슬몃슬몃 고개를 들었다.

자동차와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명사로 작고한 전철환 한국은행 전 총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충남대 교수 시절이던 1980년대 첫 차로 프라이드를 구입한 뒤 프라이드만 고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은 총재가 된 후 출퇴근할 때는 관용차를 이용했지만 퇴근 후나 휴일에 사적인 용도로 쓸 때는 기사 없이 직접 프라이드를 몰고 다녔다. 수해에 차가 침수돼 고장이 잦아지자 다시 중고 프라이드를 구입했다. 그는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총재직을 그만두면 다시 학생을 가르치는 평범한 선생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때 약간 나은 차를 구입하더라도 지금은 프라이드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인간의 소비 행위에는 복잡한 의미가 들어 있다. 특히 자동차를 구입할 때는 취향, 지위, 경제력, 과시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는 6월 동아일보가 처음 명명했던 ‘간장녀’들이 소비자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간장녀는 자기 과시보다 실속을 중시하는 가치소비의 상징이다. 정보력을 활용해 같은 제품을 남보다 싸게 사는 데 능한 소비자들이다.

가치소비가 뿌리를 내리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불황이라고 해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아예 닫아 버리는 것은 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 미국에선 베이비붐 세대가 소비를 줄이면서 2020년까지 미국 경제가 하강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일찍이 소스타인 베블런이 이야기했던 과시적 소비는 주위의 질투와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반면 가치소비는 자신의 처지와 분수에는 맞지만 남들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스미스 교수나 전 전 총재 같은 소비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가치소비를 넘어 남의 눈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과 철학에 따라 행동하는 멋진 소비자 말이다.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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