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이자를 20년 이자로 줘도 ‘완판’

이상훈기자

입력 2012-09-12 03:00 수정 2015-07-08 01:4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 한국 첫 30년 만기 국채 발행… 시장반응 과열 우려도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사는 최모 씨(50)는 얼마 전 증권사를 통해 30년 만기 국고채에 투자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 20년 만기 국고채에 투자해 올 3월까지 연수익 20%를 거두면서 국고채 투자에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최 씨는 11일 “10억 원어치를 사려고 했는데 실제로는 절반밖에 못 받았다”고 말했다.

1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오전 9시에 시작된 30년 만기 국고채 입찰에서는 4060억 원에 달하는 발행물량 전량이 연 3.05∼3.08% 금리로 8개 은행, 12개 증권사로 구성된 국고채전문딜러(PD)를 통해 낙찰됐다.


○ 임정 ‘독립공채’에서 30년물까지

한 나라의 국채는 곧 그 나라 경제의 ‘거울’이다. 대한민국 국채 역사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 100년을 압축한 것과 같다. 첫 국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했다.

하지만 주권 잃은 국가의 채권이 금융시장에서 국채로 인정받을 리는 만무해 미국 하와이 농장에서 일하던 동포들이 주로 사들였다.

정부 수립 후 1년 만인 1949년 첫 공식 국채인 ‘건국국채’가 나왔다. 그해 동아일보 12월 8일자는 ‘긴급한 치안상태에 대비하고 절대로 요청되고 있는 국방력 강화비로 충당하게 될 공채가 처음 발행된다’는 기사를 실었다. 정부는 연 5% 금리의 5년 만기 100억 원 규모의 건국국채를 발행하면서 인수대상자로 ‘유흥업자, 주류업자’를 지목했다. 대표적인 사회악(惡)으로 손가락질 받던 계층이지만 가난한 나라 곳간을 채워줄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1954년에 산업부흥채권, 1961년에 통화안정증권이 나오면서 국채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고속도로 건설재원 마련을 위한 ‘도로국채’가, 1970년엔 전력개발재원 조달을 위한 ‘전력채권’이 각각 발행됐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은 한국 국고채의 ‘암흑기’였다. 지금은 발행이 중지된 1년물 비중이 25.2%나 됐고 그해 평균 조달금리는 7.69%로 지금(3.46%)의 배가 넘었다. 10년 이상 장기채권 발행은 엄두도 못 냈다.


○ 세계가 찾는 한국 국채, 과열 우려

최근 한국 국고채를 향한 ‘러브콜’은 한국 경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 피치가 한국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하면서 해외의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1%대인 미국 국채(10년물) 및 최근까지 6%대 금리를 나타냈던 스페인 국채와 비교하면 3%대인 한국 국고채는 안전성과 수익성 모두를 보장해주는 ‘금융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처음 30년물 발행 계획이 알려졌을 때, 일부 좌파 인사를 중심으로 ‘30년간 빚더미에 올라앉는 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이는 금융시장의 기초를 이해하지 못한 무리한 주장이라는 지적이 있다.

11일 발행된 30년 만기 국고채는 특히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 ‘과열’ 양상까지 나타났다. 삼성증권은 이날 할당받은 30년물 1200억 원 대부분을 이례적으로 개인과 일반법인에 팔았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낙찰받은 국고채는 보통 기관이 인수하는데 이번에는 개인들의 요청이 워낙 많아 대부분 일선 지점에서 소진됐다”고 밝혔다.

30년 만기 상품이 20년 만기 유통금리(3.05%)보다 낮은 기현상도 나타났다. 재정부 당국자는 “30년 국채에 대한 수요가 많아 일부 금리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며 “장단기 금리 역전은 외국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